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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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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은 1729년 파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해군 제독, 탐험가, 그리고 작가였다. 그는 법학을 공부하다가 군인이 되었으며,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1760년대에는 포클랜드 제도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고, 1766년부터 1769년까지 세계 일주 항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프랑스인 최초의 세계 일주 항해 기록을 세웠다. 부갱빌은 항해를 통해 타히티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탐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 활동을 펼쳤으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1811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부겐빌 섬, 부겐빌 해협, 그리고 식물 부겐빌레아 등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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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790년 조제프 뒤크뢰의 초상화
출생지파리, 프랑스
출생일1729년 11월 12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사망일1811년 8월 31일
국적프랑스
자녀이아생트 드 부갱빌 (아들)
소속프랑스 왕국 육군 프랑스 왕국 해군
군사 경력
소속 국가프랑스 왕국
군종프랑스 왕국 육군 프랑스 왕국 해군
탐험 및 업적
설명프랑스 군 장교, 탐험가 및 귀족
추가 정보
참고 자료Étienne Taillemite, BOUGAINVILLE, LOUIS-ANTOINE DE, Comte de BOUGAINVILLE, V권, 2003년
Bruce Vandervort, Bougainville, Louis-Antoine de (1729-1811), American Revolution: The Definitive Encyclopedia and Document Collection, I권, 151–152쪽, 2018년

2. 생애 초기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은 1729년 11월 12일 프랑스 왕국 파리에서 공증인 피에르-이브 드 부갱빌(1688~1756)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던 역사가 장 피에르 드 부갱빌은 그의 형이다. 어린 시절 법학을 공부했지만 곧 직업을 포기했다. 대학 시절에는 특히 수학과 법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53년 프랑스 육군 근위 용기병대에 입대했다. 25세에 기욤 드 로피탈의 논문 ''무한소(Des infiniment petits)''를 보충하여 적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파리 고등법원에서 아보카(avocat, 법률가)로 일한 후 군사 경력을 쌓았다. 1754년 젊은 나이에 『적분론』을 출판하였고, 같은 해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755년 영국 주재 프랑스 런던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파견되어, 1756년 1월 8일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

3. 군 경력

1753년 프랑스 육군의 근위 용기병대에 입대했다. 1755년 영국 주재 프랑스 런던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파견되어 왕립 학회 회원이 되었다.

3. 1. 7년 전쟁 (프랑스-인디언 전쟁)

1756년, 부갱빌은 드라군 대대장이자 몽칼름 후작의 부관으로 캐나다(신프랑스)에 주둔했다.[3] 그는 오스위고 요새 함락과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 카리용 요새 등에서 활약했다.[3] 특히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 후 식민지에 추가적인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프랑스 정부는 "집에 불이 났을 때 마구간을 걱정하지 않는다"며 지원을 거부했다.[3] 부갱빌은 생 루이 훈장을 받고 대령으로 승진했지만, 이듬해 캐나다로 돌아왔을 때 확보한 보급품은 거의 없었다.

1759년, 부갱빌은 퀘벡 방어에 참여하여 정예 부대를 지휘하며 세인트로렌스 강 북쪽 해안을 순찰했다. 그는 영국군의 상륙과 몬트리올과의 연락선 차단을 여러 차례 막았지만,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영국군을 저지하지 못했다. 몽칼름 후작이 사망하고 1759년 9월 18일 퀘벡이 함락된 후, 부갱빌은 레비스 기사에 의해 서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일드누아에서 몬트리올에 대한 공격을 저지하려 했다.[3] 그는 1760년 9월 몬트리올 항복 전까지 저항한 장교 중 한 명이었다.[3]

유럽으로 돌아온 부갱빌은 항복 조건에 따라 영국에 대한 적극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7년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파리 조약 협상을 지원했고,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동쪽의 신프랑스 대부분을 영국 제국에 할양했다.[3]

3. 2. 미국 독립 전쟁

몇 년간의 공백 후, 부갱빌은 다시 해군 지휘권을 맡았다. 1777년, 그는 74문의 프랑스 함선 비앵에메 함장이 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의 체서피크 해전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생트 해전에서 부갱빌은 80문의 프랑스 함선 오귀스트를 지휘했다. 그는 자신의 함대 소속 8척의 함선을 성공적으로 집결시켜 생트외스타티우스로 안전하게 이동시켰다. 이는 드 그라세 백작의 패배 이후의 일이었다. 그는 ''셰프 데스카드르''(chef d'escadre)로 승진했다. 프랑스 육군에 복귀했을 때, 그는 ''마레샬 드 캉프''(maréchal de camp)으로 임관되었다.

1783년 파리 조약 이후, 부갱빌은 파리로 돌아왔다.

4. 세계 일주 항해 (1766-1769)

당시 프랑스식 이름으로 표기된 항해 지도


『세계 일주』, 파리, 1772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의 ''부데즈''호


1766년, 부갱빌은 루이 15세로부터 세계 일주 항해를 허락받았다. 그는 세계 일주 항해를 한 14번째 항해가이자 최초의 프랑스인이 되었다 (비록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 당시 함대에 속했던 노르망디의 리처드가 최초의 프랑스인이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임무 완수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의 명성을 높였다. 이것은 전문 식물학자와 지리학자들이 승선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한 최초의 탐험이었다.

부갱빌은 1766년 11월 15일 두 척의 배, ''부드즈'' (선장: 니콜라 피에르 뒤클로-귀요)와 ''에투알'' (사령관: 프랑수아 셰나르 드 라 지로다)를 이끌고 낭트를 떠났다. 이것은 대규모 탐험으로, ''부드즈''에는 214명, ''에투알''에는 116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탐험대에는 식물학자 필리베르 코메르송 (꽃 부겐빌레아를 명명한 사람)과 그의 시종도 포함되어 있었다. 코메르송의 시종은 나중에 여성 잔 바레(또는 바레, 바레트)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녀는 세계 일주 항해를 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이 탐험에 참여한 다른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천문학자 피에르-앙투안 베롱, ''부드즈''의 외과의사 루이-클로드 라포르트 박사, ''에투알''의 외과의사 프랑수아 비브 박사, ''에투알''에 탑승한 기술자이자 지도 제작자 샤를 루티에 드 로맹빌, 그리고 작가이자 역사가 루이-앙투안 스타로 드 생제르맹이 있었다.[5]

|thumb|350px|세계 일주 항로

1766년 12월 15일,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은 박물학자, 데생 화가, 천문학자를 동행하여 브르타뉴의 브레스트에서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했다. 배는 신조 프리깃함 라=부드즈 호였으며, 나중에 남아메리카에서 플루트형 수송선 레=트와르 호가 합류했다.

브라질에서는 식물학자 필리베르 코메르송이 나중에 부갱빌의 이름을 따서 부겐빌레아로 명명되는 꽃을 발견했다. 코메르송의 조수인 장 바레라는 식물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정체는 잔 바레라는 여성이었고, 나중에 선의에게 성별이 들키게 된다. 그녀는 항해 중에 하선하지만, 나중에 귀국하여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여성이 되었다.

일 마르완(Île Malouine, 생말로인들의 섬)을 스페인에 반환한 후, 그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여 태평양 횡단에 나섰다. 1768년 3월, 위험한 암초로 둘러싸인 많은 섬들 사이를 항해하며 그곳을 "위험한 제도(Dangerous Archipelago)"라고 명명했다 (현재의 투아모투 제도). 1768년 4월, 사무엘 왈리스가 막 발견한 타히티 섬에 정박했다. 그는 10일도 머무르지 않았지만, 섬 주민들의 환영을 받고 물물교환을 통해 거래를 했다. 호기심 많은 젊은 타히티인 아오토루를 데리고 출발했는데, 아오투르는 결국 파리까지 따라갔고, 돌아오는 길에 옛 이름 프랑스 섬(현재의 모리셔스 제도)에 도착해서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타히티에서 가져온 사탕수수는 프랑스령 기아나에 심어졌고, 더 나아가 브라질로 전해져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부갱빌은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는 섬(부겐빌 섬)을 탐험했다. 그는 사모아 제도 (그곳을 "항해자 제도(Îles des Navigateurs)"라고 불렀다)의 대부분의 섬을 탐험했다. 그런 다음 포르투갈 항해가 페드루 페르난데스 데 키로스가 발견한 생테스프리 제도(1980년 독립 이후 바누아투로 불리지만, 뉴헤브리디스 제도이다)를 재발견하고, 루이지아드 제도를 따라 항해하여, 스페인인 알바로 데 멘다냐 데 네이라가 1567년에 발견한 후 200년 동안 유럽인이 방문하지 않았던 솔로몬 제도에 도착했다. 이 기간 동안 자주 역풍 항해가 되어 선원들은 괴혈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지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세력권에 도착하여 몰루카 제도의 테르나테와 바타비아에서 식량을 보급했다. 처음 계획에 있던 중국 항해는 취소하고 인도양을 횡단하여 1768년 11월 프랑스 섬에 기항하여 수송선 레트와르호와 작별했다. 희망봉을 돌아 프랑스로 돌아가는 도중, 영국 해군이 파견한 세계 일주 탐험대인 필립 카트레트의 함선을 만나 이를 앞질렀다.

1769년 3월 16일, 브르타뉴의 생말로에 귀항하여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 일주를 달성했다. 1771년에 『세계 일주기』를 출판했는데, 그 안에서 유황 냄새가 나는 "폴리네시아의 낙원(Paradis polynésien)"에 대한 신화를 환기하고 있다. 이 책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소유의 개념에 물들지 않은 "고귀한 미개인"의 땅이 바다 저편에 실재한다는 인상을 유럽 지식인들에게 주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중 한 사람인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는 1772년에 가상의 등장인물이 이야기하는 소설 『부갱빌 항해기 보충』을 저술하여, 타히티인의 시각을 빌려 유럽 세계에 대한 문명 비판을 전개했다.

4. 1. 포클랜드 제도 (말비나스 제도) 식민지 건설

1763년, 7년 전쟁의 강화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포클랜드 제도(당시 "Îles Malouines") 식민지화를 결정했다.[4] 부갱빌은 영국이 충성 맹세를 거부하여 프랑스로 추방된 아카디아인들을 재정착시키는 임무를 자비로 맡았다.[4]

1763년 9월 15일, 부갱빌은 ''L'Aigle''(독수리)호와 ''Le Sphinz''(스핑크스)호를 이끌고 프랑스를 출발했다.[4] 이 탐험에는 앙투안 조제프 페르네티(돔 페르네티) 등도 포함되었다.[5] 1764년 1월 말, 탐험대는 프랑스만(이후 버클리 사운드)에 도착하여 포르 루이에 상륙했다.[4] 1764년 4월 5일 섬에 대한 공식적인 점령식이 거행되었고, 루이 15세는 1764년 9월 12일 공식적으로 점령을 승인했다.[4]

프랑스 식민지는 150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스페인은 포클랜드가 페루의 금을 공격하기 위한 후방 기지가 될까 우려하여 프랑스에 항의했다.[4] 결국 부갱빌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식민지를 해체하고 스페인에 매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부갱빌은 보상금을 받았고,[4] 1767년 1월 31일 라플라타 강에서 스페인에 정착지를 인계했다.[4]

4. 2. 태평양 탐험

1766년, 부갱빌은 루이 15세의 허락을 받아 부데즈 호(선장: 니콜라 피에르 뒤클로-귀요)와 에투알 호(사령관: 프랑수아 셰나르 드 라 지로다)를 이끌고 낭트를 떠나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했다.[5] 이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탐험이었다.[5] 탐험대에는 식물학자 필리베르 코메르송, 천문학자 피에르-앙투안 베롱 등 많은 학자들이 동행했다.[5]

부겐빌의 타히티 도착


부갱빌은 투아모투 제도를 거쳐 타히티에 도착하여 프랑스령으로 선포하고 "뉴 키테라"라고 명명했다.[5] 그는 타히티에서 원주민 아오토루를 프랑스로 데려갔다.[5] 아후토루는 이후 파리에 도착하였으나, 귀향 중 프랑스령 모리셔스 섬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

사모아 제도 (항해자 제도라고 명명)와 뉴헤브리디스 제도(현재의 바누아투)를 탐험한 후, 에스피리투 산토를 발견하고 서쪽으로 항해했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근처까지 갔으나 거친 파도로 인해 방향을 바꿔야 했다. 솔로몬 제도를 항해했지만, 주민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인해 상륙하지 못하고 부겐빌 섬이라고 명명했다.[5]

탐험대는 뉴 아일랜드 사람들의 공격을 받은 후 몰루카 제도로 향했다.[5] 바타비아에서 새뮤얼 월리스와 필립 카터레트의 소식을 접했다.[5]

4. 3. 귀환 및 저술

1769년 3월 16일, 탐험대는 세계 일주를 완료하고 생말로에 도착했다. 340명의 승무원 중 7명만이 사망하여 사상자 수가 매우 적었는데, 이는 부겐빌의 현명한 지휘 덕분으로 여겨졌다.[7]

부갱빌은 자발적으로 함께 가겠다고 한 타히티 사람 아후토루를 프랑스로 데려왔다. 프랑스에서 부갱빌은 아후토루를 왕과 왕비를 포함한 상류 사회(베르사유)에 소개했다. 또한 2년 만에 타히티로 돌아가는 아후토루의 비용 일부를 부담했다. 항해는 마리옹 뒤프렌의 지휘하에 이루어졌지만, 아후토루는 1771년 10월 항해 중 천연두로 사망했다.[7]

1771년, 부갱빌은 그의 탐험 항해기를 ''Le voyage autour du monde, par la frégate ''La Boudeuse'', et la flûte ''L'Étoile''''(일명 ''Voyage autour du monde'', ''A Voyage Around the World'')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부갱빌의 여행기 영어판(1772년) 표지
이 책은 아르헨티나(당시 스페인 식민지), 파타고니아, 타히티, 그리고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의 지리, 생물학, 인류학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타히티 사회에 대한 묘사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부갱빌은 타히티를 문명의 타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녀가 행복한 순수함 속에서 사는 지상낙원으로 묘사했다.

부갱빌의 묘사는 숭고한 야만인 개념을 표현하여 프랑스 혁명 이전에 장-자크 루소와 같은 철학자들의 유토피아적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드니 디드로의 저서 ''부갱빌 항해기 속편''은 익명의 독자가 친구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부갱빌의 타히티 상륙 이야기를 다시 풀어내며, 디드로는 타히티인을 숭고한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등 허구적인 접근 방식을 사용하여 서구의 삶과 사고방식을 비판했다.[7]

세계 일주 항해 후 귀국한 그는 해군 군인으로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체서피크만 해전, 세인츠 해전 등에 참가했다. 전후에는 새로운 탐험 목표를 정부에 제안하는 한편, 라페루즈와 니콜라 보단 등 차세대 탐험가들의 항해 준비에 참여하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살아남아 82세에 사망하였으며,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의 심장은 몽마르트르의 칼베르(칼바리오) 묘지에, 유해는 팡테온에 안치되어 있다.

5. 말년

1787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791년에는 중장 계급을 얻었다.

테러 시대를 피해 노르망디의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가 파리로 돌아와 경도국의 창립 회원 중 한 명이 되었다. 1799년, 당시 제1공화국 총영사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를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 프랑스 제1제국 시대 나폴레옹의 통치 중이던 1811년 8월 3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체서피크만 해전, 세인츠 해전 등에 참가했다. 전후에는 새로운 탐험 목표를 정부에 제안하는 한편, 라페루즈와 니콜라 보단 등 차세대 탐험가들의 항해 준비에 참여하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살아남아 82세에 사망하였으며,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북극 탐험을 계획했으나, 로메니-드-브리엔느(Étienne-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 장관에게 거절당했다. 프랑스 혁명 중에는 루이 16세에게 충실했다. 1790년에는 브레스트(Brest)의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 1791년에는 부제독이 되었으나, 규율이 어지러운 부대에 질서를 회복할 수 없어 사임했다. 1792년에는 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장관직을 거절하고 해군을 은퇴했다.

테러 시대에는 체포되었으나,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석방되었다. 1789년 이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 준회원이었으며, 1796년에는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 정회원 및 황경국(역법을 작성하는 기관) 구성원으로 선출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에게 여러 가지 영예를 안겨주었다. 1799년에는 원로원 의원, 1804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 트피시에(대장교) 훈장, 1808년에는 제국 백작 작위를 받았다. 1809년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책임을 묻는 군사 고문 회의를 주재하였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직이 되었다.

그의 심장은 몽마르트르의 칼베르(칼바리오) 묘지에, 유해는 팡테온에 안치되어 있다.

6. 유산

파푸아뉴기니의 가장 큰 동쪽 섬과 이 섬을 쇼이설 섬(Choiseul Island)에서 갈라놓는 부겐빌 해협(Bougainville Strait)에 부겐빌(Bougainvill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말리콜로(Mallicollo)와 에스피리투산토(Espiritu Santo) 섬 사이의 해협에도 사용된다. 포클랜드 제도에서는 포트 루이(Port Louis, Falkland Islands)와 "이스라 부겐빌(Isla Bougainville)" (리블리 섬의 스페인어 이름)이 그를 기념한다.

화려한 포엽을 가진 남미 등반 관목의 속인 ''부겐빌레아(Bougainvillea)''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04년, 그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Grand Officier de la Légion d'honneur)이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은 그에게 부겐빌 백작(Comte de Bougainville)이라는 작위를 수여했다.

프랑스 해군(French Navy)의 13척의 함선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7.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Dictionary BOUGAINVILLE, LOUIS-ANTOINE DE, Comte de BOUGAINVILLE http://www.biographi[...]
[2] 백과사전 Bougainville, Louis-Antoine de (1729-1811) https://books.google[...] ABC-CLIO 2021-05-01
[3] 문서 Cave
[4] 서적 The Falklands/Malvinas Case: Breaking The Deadlock in the Anglo-Argentine Sovereignty Dispute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001-02-01
[5] 웹사이트 Essential Oceanic Expeditions from the beginning of Zoological binominal nomenclature until the 1950s. http://www.tmbl.gu.s[...] 2010-11-01
[6] 서적 Voyage autour du monde https://archive.org/[...] J. Nourse
[7] 서적 Aphrodite's Island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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